영광 임진수성록(靈光 壬辰守城錄)
도로명주소 :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296
문의처 :
소개
수량 : 1책
시대 : 조선 영조
임진왜란이 터진 가운데 전라도 영광군에 있었던 읍성을 지켜낸 사례와 향촌에 있던 사림들의 전란극복 의지가 소상히 기록된 문헌자료로, 총 1책 21장이다.
「임진왜란수성명첩서」, 「임진수성록」, 「수성명첩」, 「수성법」 등이 실려 있다. 내용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0월 영광군수 남궁견이 상중에 있어 상복을 입고 있을 때, 수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역의 선비들이 읍성방위 및 행정업무를 자치적으로 수행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책의 끝부분에 남겨진 글로 보아 영조 29년(1753)에 봉정사에서 인쇄하여 출간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향토방위 사례를 생생히 전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당시의 의병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중 전라도 영광군에서 있었던 읍성방위 사례 및 재향사림(在鄕士林)의 전란극복 의지가 소상하게 기록된 문헌자료이다. 읍성방위의 실상과 수성체제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이 문헌은 조선후기에 인출된 사서로서 임진왜란 의병사 연구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영광 향중유림에 의해 간행된 이 책은 그 끝부분에「상지이십구년계유중추개간우봉정사(上之二十九年癸酉中秋開刊于鳳停寺)」라고 한 것으로 볼 때, 1753년(영조 29) 봉정사(鳳停寺), (현재 장성군 삼계면 소재)에서 인출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 자료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2년 10월 영광군수 남궁견(南宮견)이 복상중(服喪中)이라 수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지역의 선비들이 읍성방위 및 행정업무를 자치적으로 수행했던 사실을 기록한 문서이다. 1책 21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임진왜란수성명첩서(壬辰倭亂守城名帖敍)」및「임진수성록(壬辰守城錄)」·「수성명첩(守城名帖)」·「수성법(守城法)」등이 실려 있다.
본서의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 영광의 향중사림이 자치적으로 읍성을 지킨 기간은 임진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약 5개월 간에 걸친 기간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먼저 24개의 부서를 편성한 다음 각 부서의 책임자를 배정함으로써 수성군 방위조직을 갖추었다. 그런데 24개 부서 가운데 도별장(都別將)을 위시하여 그 밑에 둔 부장(副將)·종사관(從事官)·군정(軍正)·참모관(參謀官)·장문서(掌文書)·폐요관(弊寮官)·도청서기(都廳書記) 등의 직책이 주로 행정관련 부서인데 대하여 수성장(守城將)·도청서기(都廳書記)·대장군관(大將軍官)·동외진장(東外陣將)·서외진장(西外陣將) 등의 부서가 전투부서란 점에서 볼때 자율적으로 조직된 수성군이 읍성방위와 지방행정을 겸행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수성장을 중심으로 그 밑에 편제된 전투부서의 명칭들을 보면 향토방위를 위한 수성군의 전투체제가 빈틈없이 짜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주위에 군사들을 집중 배치하였으며 성남문과 북문의 수비를 강화하여 양쪽에 수문장을 둔 한편, 유군장(遊軍將)을 두어 그 밑에 기동타격대 성격의 군사들까지 두었다.
도별장 이응종(李應鍾)을 비롯하여 부장 강태(姜泰)·군정 정희맹(軍正 丁希孟)·참모관 유익겸(柳益謙) 등 재지사림의 형제자질을 주축으로 조직된 이들 수성군은 「동맹지인 기맹지후 유불여약지참(同盟之人 旣盟之後 有不如約者斬)」이라 하여 결사 항전을 맹서한 내용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진수성록』은 중앙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료로서 임진왜란시 지방
에서 이루어진 향토방위의 사례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문헌이란 점에서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한 지방에서 인출한 이 사서는 그 작성주체와 간행연대 및 장소 등이 확실한 것으로 임란의병사 연구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