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古代社會)의 성립
선사시대先史時代는 아직 문자가 발명되지 않아 역사기록이 없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인류가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토대로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고고학考古學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복원 해석된다.
광복 이후 고고학 방법에 의한 발굴 연구가 1960년대에 이루어지고, 영광지역에서는 1973년에 백수일대의 고인돌이 처음으로 발굴 소개되었다. 이후 고인돌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 이후 각 시기에 걸친 집자리와 무덤, 유적들로 확대되어 이제 영광지역의 선사문화를 일정 복원하는 성과를 거두어 선사시대가 포함된 영광의 온전한 역사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원시사회原始社會는 어느 특정한 지역과 관계없이 모든 종족의 보편적인 단계에 해당한다. 영광에서도 인류 최초의 문화인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원당·마전·군동 유적을 비롯하여 현재 12개소가 조사 보고되어 이 지역에서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들이 살았던 시기는 대체로 4만 5천~1만 5천년 전으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집자리가 생활근거지 주변인 강가에 분포되어 있으며,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고 채집경제를 영위하면서 가족 단위의 무리사회(群社會)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염산·낙월면의 섬지역에서 패총貝塚 3개소가 발굴되어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물론 영광에서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매우 빈약하지만 앞으로의 발굴조사에 따라서는 내륙의 해안가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아 주목된다. 이들 신석기들은 간석기(磨製石器)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고, 농경 정착의 움집(竪穴住居) 생활을 계기로 혈연관계가 보다 확산된 씨족氏族 단위의 부족사회部族社會로 발전하게 된다. 영광의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143개소로서 가장 많이 발굴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134개 지역에 712기로서 주로 받침돌 4개가 고인 기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읍면 곳곳에서 발굴될 정도로 청동기문화가 영광 전역全域에 확산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백수·홍농읍과 대마면, 불갑면, 묘량면, 군서면, 군남면 일대에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마전·군동 유적에서는 금강이나 영산강유역과 동일한 문화권의 주거지가 발굴조사 되었다.
이들 영광의 청동기인들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10~5세기에 살았으며, 청동검과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비약적인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계층·계급 분화가 진전되고, 최초의 정치사회인 군장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바로 고인돌의 주인공은 그 축조 운반이나 군집 현상으로 보아 권력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B.C. 4세기 무렵 후기 청동기문화 위에 철기문화鐵器文化가 보편화되면서 종래의 군장국가는 연맹왕국 단계로 발전하여 고대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과 생활
영광지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은 총 12개소인데, 이 중 대마면 원흥리 원당·마전·군동유적이 발굴조사 되었다. 이는 영산강과 서해안지역의 저평한 구릉지대에서 최근 많은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특징 유물인 뗀석기는 지표상에서 발견되기는 쉽지 않다. 지층이 삭토되거나 자연 유실되었을 때 발견된 경우가 많고, 원래는 지표면 하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깊게는 수m 아래에서 발견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영광지역에 많은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마전유적의 뗀석기는 갱신세 토양 중 2개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윗 문화층의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 자갈로 만들어졌으며, 층위로 볼 때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아래 문화층의 석기는 매우 적으나 층위 상중기구석기시대로 추정되어 중요하다.
원당과 군동 유적의 구석기는 주로 석영맥암으로 제작된 것들로써, 석기 제작 방법을 알려주는 몸돌과 격지, 망치돌이 있으며, 사냥돌과 톱니날, 긁개, 홈날 등이 있다. 문화층이 상부와 하부 토양쐐기 사이에 존재하며, 석기의 제작기법으로 직접떼기가 쓰였고, 석기 갖춤새로 보아 중기구석기시대로 생각된다.
마전·군동·원당유적에서 확인된 구석기유적은, 영광지역의 구석기인들이 중기구석기시대부터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영광지역의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시기는 전남지방에서 측정된 절대연대로 보아 대략 4만 5천 년 부터 1만 5천 년 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광의 구석기인들은 유적들이 발견된 지형으로 보아 나지막한 구릉상에 생활의터전을 잡고 살았다. 그들의 생활 모습은 다른 지역에서 밝혀진 것들과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에서 생활하거나 인위적으로 집을 짓고 생활했다. 집자리는 대부분 생활근거지 주변인 강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유적의 문화층이 강가 퇴적층위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집자리의 구조는 대개 바닥이 타원형이나 장방형으로 파여 있고 원뿔 모양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광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3개소인데, 유물산포지 1곳과 조개무지 2곳이다. 염산면 오동리 연화유적, 낙월면 상낙월리 조개무지, 낙월면 송이도 조개무지가 있다. 조사된 유적들 중에는 빗살무늬토기가 확인되고 있어 그동안 공백기로 남아있었던 이 시기문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오동리 연화유적은 마을의 동쪽 산의 능선부에 위치한다. 유물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계통의 점열문, 사선문이 새겨진 토기조각이 수습되었다. 상낙월리 조개무지유적은 낙월도 선착장 뒤의 작은 구릉으로부터 연결되는 패각층의 흔적이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경작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조개무지의 규모는 길이 50×10m이다. 패각층의 두
께는 1.5m 정도이고, 빗살무늬토기편 2점이 확인되었다. 송이리 조개무지유적은 송이리 대촌마을에서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의 곡간 대지상에서 패각층이 확인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 구연부(입술부분), 동체부(몸통부분), 저부(바닥부분)편 등 8점이 수습되었다.
영광에서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도서지역에서 발견되지만 내륙의 해안변에서도 발견될 소지가 많다.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는 서해안지역을 따라 나타나는 조개더미유적들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철저한 조사를 한다면 더 많은 유적이 발견될 것이고, 내륙의 저평한 구릉지역에서도 집자리와 같은 유적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 발견된 조개무지유적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영광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밝힐 필요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회는 국가 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사회에서 점차 지배층이 등장하는 계급계층사회로 변화되어 가면서 역사상의 마한 소국들이 각 지역에서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영광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집자리와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집자리가 확인된 곳은 영광 마전유적과 군동유적이다. 영광에서 발굴된 집자리는 금강이나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집자리의 형태나 출토 유물 측면에서 보면 같은 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영광지방에 분포된 고인돌은 114개 군집지역에 512기이나 유실된 고인돌을 포함하면 원래 134곳에 663기가 분포되어 있었다.
영광군 고인돌의 특징은 탁자식고인돌과 기둥모양의 고인돌柱形支石을 한 기반식 고인돌을 들 수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모두 5기인데, 군남면 설매리 동고, 불갑 쌍운리 회복, 백수 죽산리 명산, 묘량 삼학리 왕촌, 묘량 삼효리 석전 등이다. 이 탁자식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 판돌板石로 된 길이 150cm 내외의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태이다. 영광에서 발견된 기반식 고인돌은 괴석塊石형 덮개돌 밑에 자연석으로 고인 것과 사각형으로 다듬은 장주석을 세워 고인 것이 있다. 앞의 고인돌은 받침돌이 4~6개이나 기본은 4개이다. 이 형식은 백수 길용리 용암·천마리 금자동, 홍농 단덕리 마래·가곡리 가학·진덕리 서당, 군남 반안리 대안·동월리 매화·남창리 석암·용암리 조양·대덕리 흥곡, 불갑 가오리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마한시대(馬韓時代)의 영광(靈光)
역사시대의 전단계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서 영광을 비롯한 전남지역은 연맹왕국 삼한三韓의 하나인 마한馬韓에 속하였다.
영광에서는 영광읍 학정리 강변과 대마면의 수동·마동 유적 등 총 11개소에서 독·움무덤 등과 주거지가 확인되고, 여기에서 다양한 토기·철기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철기문화 후기(B.C. 전후~A.D.300)의 마한시대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영암과 나주 일대에 분포한 거대한 분구묘는 한 봉토 안에 독·돌방무덤이 안치되어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자료에 해당한다.
또한 고대사회古代社會에 해당하는 시기의 고분은 10개소에서 확인되었는데, 주로 돌방무덤石室墳이 주류를 이룬다.
영광읍 대천고분은 이른 시기 독무덤과의 관련성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법성면 월계고분은 장고분長鼓墳으로서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유사하다. 이들 무덤의 축조 시기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이는 마한이 5세기 중엽까지 반남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옹관고분을 사용하면서 전성기에 달했으며, 이 시기에 백제식 돌방무덤을 축조하다가 백제에 병합된 사실을 반영한다.
현재까지 영광지역 군장국가의 실체는 전혀 알 수 없으나 마한 54국 안에 편제된 ‘작은 나라小國’로서 고인돌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막로국莫盧國·모노비리국牟盧卑離國(영광읍), 고랍국古臘國(염산면), 신운신국臣雲臣國(군남면 남창리 일대)이 위치해 있었다고 비정되어 왔다.
이들 군장국가들은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무덤 등의 대형 고분을 축조하면서 백제의 강성에 맞섰으나 4세기 후반 이후 전남지역에서 점차 백제식 돌방무덤이 조성되어간 것처럼 점차 백제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역시 전남지역은 근초고왕(346~374)의 마한 공취 이후에도 강력한 토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동성왕(479~500)의 남방정벌에 따라 중앙의 통치력에 편제되어 갔다.
이후 상당한 기간에 걸쳐 독무덤과 돌방무덤이 병존한 것처럼 이들 군장국가의 토착적 기반은 강인했지만, 백제의 중앙통치력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는 이 지역의 독무덤이 5세기 중엽 이후 백제 돌방무덤의 출현으로 점차 소멸되어간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마한시대(馬韓時代)의 생활상(生活相)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유일한 기본사료인 위지(魏志)가 일종의 풍토기(風土記)요 단순한 견문기(見聞記)에 불과하므로 국가의 정확한 생멸년대(生滅年代)마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 기준하여 본다면 한(漢)나라가 우리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에 있던 위씨조선(衛氏朝鮮)을 수륙(水陸)으로 내침(來侵)한 것이 BC109年이요 그후 사군(四郡)이 설치된 것이 BC108年이니 지금으로부터 약(約) 2100年前의 사실이다.
이때는 시대구분(時代區分)으로도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지나 철기시대(鐵器時代)에 접어들었으나 아직도 일부(一部)에서는 금석(金石)을 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부족공동체(部族共同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제정(祭政)만 분리된 단계에 머물렀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군장(君長)의 칭호는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이 있었고, 제주(祭主)는 천군(天君) 혹은 제사장(祭祀長)이라고 하였다. 각국 읍(邑)마다 한명(一人)의 천군(天君)이 소도(蘇塗)라고 하는 제사지역(祭祀地域)을 관할하였는데 그 신성지역(神聖地域)은 범죄자가 들어가도 잡아가지 못하는 불가침의 지역이었다.
의식생활(衣食生活)은 이미 원시형태에서 벗어나 농경(農耕)을 대단위화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물을 가두어 농사에 이용하기도 하였고 철(鐵)을 녹여 농구(農具)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충(天蟲)인 누에를 길러 천을 짜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우마(牛馬)를 길러 농사(農事)를 활용하였고 해안지대에서는 바다에 발을 쳐 고기를 가두어 잡기까지 하였다. 특산물로서는 꼬리가 긴 세미계(細尾鷄)와 배만큼이나 큰 밤이 유명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서는 움집, 산지(山地)에서는 귀틀집을 지어 살았는데 의복은 나무껍질을 이용한 삼베와 모시베 명주 등으로 지어 입었다.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여자는 가래머리를 얹었다. 신발은 집이나 가죽으로 만들었고 구슬은 재보(財寶) 이외에 장신구(裝身具)로도 썼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고분부장품(古墳副葬品)에서 알 수가 있다. 풍속은 매우 온순하여 길가는 사람끼리 서로 앞을 사양할 정도로 예절이 밝았고 형벌(刑罰)은 엄하였다. 또 마한인(馬韓人)들은 본래 성품이 낙천적이어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연중행사로는 5월과 10월에 크게 천신天神(태양신太陽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모든 부족원(部族員)들은 주야(晝夜)로 모여 놀며 즐겼다. 많은 사람들이 손발로 장단을 맞추며 춤과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도 남아 성행중인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의 강강술래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의 칭칭나래의 원류(原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대하게 치루어지는 두 번의 큰 행사는 5월에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와 10월에 추수감사제(秋收感謝祭)와 유사한 성격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후(死後)의 장사(葬事)는 일반적으로 후(厚)하게 지냈는데 우마(牛馬)를 순장(殉葬)하는 풍습도 있었다.
영광지역은 삼국시대의 전개에 따라 백제에 편입된 후 근초고왕대(346~375)인 4세기 후반부터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만南蠻’으로 지칭된 이들 세력들은 공납과 왕후제를 통한 백제의 간접지배 속에서 적어도 2세기에 걸쳐 독자성을 견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5세기 후반에 백제양식과는 다른 계통인 법성면의 월계 장고분長鼓墳이 축조되고,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대형옹관분이 6세기 이후까지 지속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광 최초의 국가적 행정지명인 ‘무시이군武尸伊郡’은 6세기 중엽에 백제의 방군성제方郡城制의 확립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백제의 5방 중에서 남방의 하부 행정단위로 편제된 14군 44현은 전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며, 무시이군의 어원語源은 해수가 깊이 유입된 지역을 시사하는 의미로, 영광읍에 치소治所를 두고 주변지역인 고창의 상노현上老縣(무장면)·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고창읍)·송미지현松彌知縣(의장면)을 관할하였다.
이와 함께 현재의 염산면과 백수읍, 군남면에는 각각 고록지현古祿只縣과 아로현阿老縣이 설치되어 아차산군阿次山郡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영광의 연혁은 주요 지역인 무시이군과 함께 그 일부가 편제된 아차산군을 포괄한다.
이러한 편제는 백제의 중앙 통치력이 영광에 파급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백수읍 금마동과 법성면 성촌마을의 백제식 석실분이 조성된 배경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각 지방에 지방관을 모두 파견하지 못했으며, 석실분의 주인공이 토착세력가였으므로 일정 정도 토착적 전통기반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사의 전개에 있어서 영광은 불교 도래지로서의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지역에 속한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을 통해 인도출신 승려 마라난타가 전파하여 공인되었다. 물론 『삼국유사三國遺事』 마라난타조 등에 입국 장소와 도래지가 자세하지 않고, 백제불교가 중앙집권국가 발전의 필요에 따라 수용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영광 법성포와 백수 구수리 일대에는 지금까지 마라난타가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도착했다는 등 다수의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
또한 불갑사의 고적기古蹟記는 절의 초창初創이 백제 초기에 이루어진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며, 나주 불회사佛會寺 대법당과 대양문의 중건 상량문에는 마라난타가 초창했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여러 구전 자료는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관찬사서官撰史書 등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 보완해 주는 내용으로 적극 활용된다.
더구나 백제불교의 도래지가 영광이었고, 불교가 창시된 인도의 스님이 직접 전파 포교했다는 점에서 그 철학 수준이 고구려·신라보다 매우 높았을 것이라는 사실도 장차 연구 과제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영광의 무시이군과 고록지현·아로현은 일련의 변화를 보았다.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 주군현제州郡縣制에 근간을 둔 지방행정체제를 재편성하게 된다. 영광은 처음 백제 고토를 장악한 당의 7주 52현 체제에 따라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에 기록된 것처럼 무시이군이 사반주沙泮州의 속현인 모지현牟支縣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모지현이 사반주의 치소로서 장성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자세하지 않다. 더구나 당시 영광이 모지현으로 개칭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개편이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시도한 일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학계에서는 영광의 연혁을 논의할 때 모지현을 제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의 지방개편은 당나라 세력을 축출한 후 신문왕 5년(685)에 9주 5소경제小京制로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영광은 무주武州(광주)의 관할로 바뀌었다가 경덕왕 16년(757)에 있었던 대대적인 군현 정비 때에 무령군武靈郡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영광의 국가적 행정지명이 무시이군에서 무령군으로 개칭되었으나 그 관할지역은 군현 편제과정에서도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당시 개칭된 장사현長沙縣(무장면)·고창현高敞縣(고창읍)·무송현茂松縣(의장면)을 계속 관할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현재의 영광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고록지현과 아로현도 압해군壓海郡 관할의 염해현鹽海縣과 갈도현碣島縣으로 개칭되었다.
이처럼 통일신라의 지방통치에 있어서 영광이 무주에 편제되고, 군현 명칭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백제시대의 위상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그러나 영광을 비롯한 전남지역의 토착세력은 그 기반이 강인했던 백제시기와 비교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좌하는 촌주村主나 향리 등의 지위로 격하되어 갔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 단순히 지방관을 보좌했던 지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의 행정을 합의 결정하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후기와 같이 중앙의 지방통치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통치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존재였으며, 그것은 후삼국시대에 영광에서 독자적인 토착·해상 세력이 대두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광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읍격邑格이 높아져 그 관할지역도 확대되는 특징을 지닌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를 비롯하여 대부분 견해처럼 ‘신령스런 빛을 지닌 곳’의 뜻을 지닌 영광靈光이란 오늘날의 지명도 태조 23년(940)의 지방개편에서 유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개편은 후삼국통합의 공헌과 호족豪族 통제 등 중앙통치력의 확대에 따른 것으로 현종 9년(1018)에 일단락되었다.
영광은 후삼국시기에 해로의 요충지로서 900년 이후부터 고려의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이들 서남해세력은 종래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기반으로 왕건의 후삼국통합에 크게 기여했으며, 영광의 대표적인 호족으로 추정되는 영광전씨 종회는 많은 전공을 세운 고려의 개국공신이었다. 따라서 태조 때에 ‘영광’으로 개칭된 배경에는 영광의 지리·전략적 위치 이외에도 이들 호족들의 공훈을 고려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의 지방개편은 중앙집권화정책에 따라 지방 통치력을 확대하고, 호족의 지위를 낮추려는 성종대의 개혁으로 본격화되었다. 성종 2년(983)에 12목이 설치되고 처음으로 외관外官을 파견했으며, 992년에는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주요 포구를 개명하여 중앙의 실질적인 지배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영광 입암리의 아무포阿無浦는 부용포芙蓉浦로 개명되고, 지금의 법성면 입암리에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전남의 서해안과 서북지역의 세공을 관리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성종 14년(995)에 12절도사·10도제로 개편되면서 14주 62현으로 구성된 전남지역의 해양도에 편제되어 별호別號인 정주靜州·오성筽城이 유래하게 되었다.
현재 이 개편을 거의 호족 통제책으로 보고 있으나 그 배경에는 성종 12년의 거란 침입을 계기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 절도사체제로의 전환이 요구되었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므로 이와의 관련성에서 영광의 별호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영광의 위상은 고려의 지방개편이 4도호·8목과 그 아래에 56지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의 설치로 완결되는 현종 9년에 더욱 높아진다.
영광은 나주목羅州牧에 편제된 5개 속군屬郡의 하나로 편제되었으나 계수관인 나주목과는 독립적인 행정단위를 이루어 그 읍격에 관계없이 모두 외관이 파견되었다. 본래 고려시대의 지방행정체제는 모든 군현이 상하관계를 의미하지 않는 속현屬縣·계수관제界首官制의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영광은 압해壓海·장성의 2개 속군과 삼계三溪·육창陸昌·해제海除·임치臨淄·장사長沙·무송茂松· 함풍咸豊· 모평牟平의 8개 속현을 거느린 중요 행정거점지로서의 대군大郡이 되었다. 이들 속군현은 영광과 영속관계領屬關係를 이루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개편은 호족들의 세력권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외관의 역할도 이들을 통제하는데 있었으며, 이후 향리 등도 거듭 규제하게 된다.
이러한 군현체제는 예종 원년(1106)부터 시작된 감무監務의 파견으로 변화된다. 당시 외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군현이 광범하게 존재하였고, 유민流民의 안집安集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영광에서는 장사현의 감무가 무송현을 겸임한데 이어 명종 2년(1172)에는 장성군과 진원·모평·함풍현에도 파견되었다.
더구나 고려후기 삼별초 진압과정에서 내려진 공도령空島令에 따라 영광 소속의 임치현과 육창현도 육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물론 감무의 파견과 군현의 이치移置 자체가 곧바로 영속관계의 해체와 군현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폐기 축소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는 영광의 위상이 축소되었다는 측면보다는 고려후기 일부 군현의 피폐라는 사회적 시련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영광읍에 위치했던 녹사역綠沙驛은 명종 때에 감무파견에 따라 장성의 단암역이 부상하기 이전까지 속군현과의 교통은 물론 전주와 나주를 잇는 간선도로의 중간역이자 장성·고창의 내륙과 신안의 도서를 연결하는 결절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후기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내적 사회발전으로 조선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한 시기이지만 몽고蒙古와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은 시기였다. 몽고는 고종 18년(1231)에 시작하여 고종 46년(1259)에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전후 6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지에서 줄기찬 대몽항쟁對蒙抗爭이 전개된 것이지만 이에 따른 살육과 참화는 매우 극심하였다.
전남지역은 6차 침입에 해당하는 고종 42년(1255) 차라대車羅大의 공략으로 전화戰禍를 입었다. 이때에 영광의 해안주민들은 둔전屯田 설치가 용이한 임자도에 입보入保하여 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원종 11년(1270) 이후 배중손裵仲孫 등이 진도와 제주도에서 전개한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조정의 공도령에 따라 영광 소속의 임치·육창현 일부지역 주민들이 육지로 사민徙民되어 무인도화됨으로써 사실상 관할 영역의 축소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고려가 각 지역의 병력과 물자를 삼별초 진압에 동원했을 것이지만 당시 영광군주사를 역임한 김태현金台鉉이 제주도에 건너가 삼별초에 대항하다가 전사한 일부 사실만이 확인된다. 이와 함께 왜구 침입은 공민왕대의 후반기에 연해지역에서 점차 내륙으로 확대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영광은 사료상 두 차례의 조선漕船 약탈이 확인되는데 물산이 풍부했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부용창芙蓉倉 등이 주요 대상이었으며 그 횟수도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지방편제와 향교.사림
조선의 집권체제는 태종대(1400~1418)의 관제개혁을 시작으로 성종 16년(1485)에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조선사회는 양반이 최고의 신분층을 형성하면서도 과거科擧를 통한 관료들이 중심이 된 양반관료제兩班官僚制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의 지방제도 역시 건국 이후 더욱 정비되어 8도제로 완비된다. 이로써 전국은 8도로 구획되고 그 아래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었다. 이러한 지방제도는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반영한 것으로 고려시대보다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지방제도는 동일한 행정구역이면서도 5도와 양계兩界로 구분하였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屬縣이 광범하게 존재하여 호족豪族·향리鄕吏들이 인적人的으로 지방을 장악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양계 자체를 일반 행정구역인 도道로 전환시켰으며, 지방관을 대거 파견하여 속현이 없어지고 호족·향리를 배제하는 철저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영광은 조선초기의 대대적인 군현 병합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를 보지 않고 나주목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종래 부곡이었던 진량陳良·홍농弘農·공아貢牙가 지방관이 직접 지배하는 직촌直村으로 편제되고, 대안大安과 망운望雲이 향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개편은 천민집단의 해체라는 역사발전의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피폐한 임내任內를 개편하고, 감무監務 파견의 군현에 종래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었다. 또한 군현의 이속移屬 과정에서 태조 1년(1392)의 해제현에 이어 태종 9년(1409)에는 모평현이 함풍현과 합쳐져 함평현으로 분속되는 관할지역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태종 7년(1407)의 인보법隣保法에서 비롯된 면리제面里制의 전면 시행 속에서 영광은 다른 지역보다 많은 331호戶에 인구 2,137명으로 나타나 당시 영광이 나주와 함께 서남해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면리제는 임진왜란 이후 수취제도 개편과 호구 파악 등의 추이에 따라 촌락단위의 편제가 일반화되었다.
영광은 연변沿邊에 위치한 연읍으로 왜구 방어가 긴요했기 때문에 읍성邑城과 같은 방어시설의 완비가 필요하였다. 세종 3년(1421)에 고려시대의 우산성牛山城을 개축하여 영광성으로 개칭하고, 2년 뒤에 영광읍성을 축조하였다. 그 후 우산성이 훼손되고 영광읍성의 공청公廳이 비좁아 세조 때에 새로운 영광읍성城山城이 신축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까지 그 기능을 다하다가 현재 원형이 대부분 훼손된 상태로서 일부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와 함께 조창漕倉을 보호하기 위해 법성진성法聖鎭城이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부용창芙蓉倉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15개 군현을 관할할 정도로 그 비중이 더욱 커지자 법성창法聖倉으로 개칭되고 그 소재지도 현재의 법성포로 이건되었다. 더구나 중종 7년(1512) 무렵에는 나주 영산창이 폐창되면서 나주 소속의 주현을 대부분 흡수하여 28개 군현의 조세를 관할하는 전국 최대의 거창巨倉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중종 9년(1514)에 법성진法聖鎭이 설치되고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수군을 증강하게 되었다.
특히 영광은 본론에서 언급된 것처럼 여러 목장이 설치된 지역이었으며, 여러 진상·특산품들을 통해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영광의 물산을 엿볼 수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의 향학鄕學을 정비하여 1읍 1개교를 원칙으로 지방에 설치했던 국립 교육기관이다. 영광향교는 조선 건국(1392) 직후인 1407년에 성균관을 복원할 때 참고했을 정도로 매우 규모가 있었으며, 이는 곧 고려 공민왕 때에 창건되었다는 구전口傳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시사한다. 그 후 새로이 영광읍성을 신축하고, 세조 11년(1465)에 관사를 준공할 무렵에 지금의 교촌리로 이전되었다. 영광향교는 배치구조상 제향祭享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을 앞에 두고,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뒤에 배치한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향민 교화와 미풍진작을 통한 예교사회禮敎社會의 구축에 진력한 교육기관이었다. 물론 향교는 16세기 이후 서원의 흥성으로 침체를 면하지 못한 채 고종 31년(1894)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러나 향교는 서원書院과 함께 향토의 정신적 지주로서 민족의 위기극복과 선현을 닮으려는 결집체이자 한국정신의 산실産室로서 오늘의 산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의리정신의 발양지 영광
영광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괄李适의 난에 걸쳐 사림의 의리義理 정신에 바탕을 둔 의병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한다. 성리학이 이념적 정치교학으로 더욱 정착된 것은 사림세력의 성장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유학적 정통론正統論을 재해석하여 의리정신을 고양하고, 도통道統을 보편적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특히 성리학은 벽이단闢異端· 춘추대의春秋大義 정신이 강하여 정학正學 이외의 사상과 이민족異民族을 배척하기 마련이었다. 의리는 인간이 현실사회에서 인간답게 ‘마땅함’과 ‘올바름’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잘못된 정치와 현실을 비판하는 정신으로 기능했으며, 외민족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바로 영광의 기의起義는 국가존망國家存亡의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 생명까지 내맡길 수 있는 참용기와 결합한 사림들의 의용義勇으로 실천된 것이었다.
이러한 영광사림의 대의는 인조 2년(1624)에 이괄의 난리가 일어나자 다시 갑자창의甲子倡義로 계승되었다. 당시 활동상은 그 일원이었던 신응순辛應純(1572~1636)의 『성재집省齋集』 별집에 기록 정리되어 있다. 이 사건은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논공행상에서 직접 표면화된 서인 집권층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영광사림은 국왕이 공주까지 피난한 상황 속에서 신유일辛惟一 등 50여인을 주축으로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더구나 호남 전체의 중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영광지역의 전란 피해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0일내에 100여석의 모곡을 수합한 것 등은 그 의미가 매우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인조 5년(1627) 명과의 연결을 경계하고 있었던 후금後金이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구실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켰다. 그 후 인조 14년(1636)에는 군신관계 강요에 대항코자 했던 조선을 거듭 침공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키자 결국 국왕이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항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침 속에서 영광의 ‘정묘거의’는 호남이 임진왜란 때에 의병의 본고장이었음을 전제로 다시 거의할 것을 청원한 통문通文에서 비롯된다.
특히 서울에서 지방으로 통문을 보낸 인물들 중에서 신응망·김여옥은 영광출신이었고, 바로 신응망은 수성동맹 종사관이었던 신장길의 아들이자 갑자창의의 주역이었던 신유일의 족질族姪이다. 이와 같이 영광사림은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걸쳐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뚜렷한 활동상을 나타내었다. 또한 임진년의 읍성 수성동맹원이었던 재지사림의 후예들이 다른 지역과는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했다는 사실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특히 전란 중에도 기록들을 남긴 정성과 호국의 의지는 매우 높게 평가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이와 관련된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함께 이들의 학맥과 사상이 더욱 연구되어 지역성을 뛰어넘어 한국사에 있어서의 지위가 새롭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 사우와 사회상
영광의 학술 발전과 사림 진작에는 영광향교와 함께 서원書院 같은 사학기관이 크게 기여하였다. 영광의 서원은 그 설립시기가 대체로 뒤늦고, 처음 사우祠宇에서 전환된 것이 다수를 이루지만 한국 서원의 성격처럼 사림정신의 산실産室이었음은 물론이다.
현재 영광에는 묘장서원畝長書院·내산서원內山書院·이흥서원驪興書院·계송서원桂松書院·무령서원武
靈書院·보촌서원甫村書院·송림사松林祠·우산사牛山祠·월현사月峴祠·지산사芝山祠·덕림사德林祠·남강사南崗祠·송촌사松村祠·검산사儉山祠·장산사長山祠·지장사芝庄祠·임진수성사壬辰守城祠 등이 있다. 이들 서원·사우는 그 행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학덕과 충절의 요람이었다.
특히 영광은 중앙 각 기관의 농민 침해가 극심한 지역의 하나였다. 본래 영광은 1897년에 지도군이 신설되기 이전까지 많은 섬을 보유하였다. 이들 섬과 연안지역은 중앙 각 기관의 절수지折收地가 되어 어장세와 토지세를 중첩 납부하는 형편에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각 기관이 재원조달을 위해 지방에 많은 둔전을 설치한 결과 소유·경작·수세收稅의 성격상 수많은 분쟁이 초래되었다.
특히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영광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 은 19세기 후반 영광지역의 사회상을 반영한 기초 자료에 속한다. 이 자료는 영광주민들이 관아에 올린 일종의 청원 소송장인 민장과 그에 대한 지방관의 처결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으로 1870년 6~12월, 1871년 1~12월, 1872년 1~11월, 1897년 2~5월 등 4년분 총 7,291건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영광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1532년, 1629년, 1755년에 발생한 강현降縣과 함께 당대의 대성리학자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얽힌 망화정望華亭(한강이 최초 건립자로 추정)이다. 강등이란 읍민 중에서 강상綱常·반란죄叛亂罪 등을 범했을 때 내려지는 일종의 통제책이었던 것이지만 영광의 위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곧바로 환원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구수면九水面 해안가에 위치한 망화정과 영호정 등은 현존하지 않으나 응암鷹巖과 그 주변의 절경絶景으로 이름난 명승지였고, 당대의 대유학자였던 송시열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국권수호투쟁기의 동학농민. 의병운동
영광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1880년대 말부터 동학이 포교布敎된 지역의 하나이자 1894년에 전개된 반중세反中世의 근대개혁과 일제 구축驅逐을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의 주 무대였다. 동학은 철종 때(1850~1863)에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외세 침탈에 따른 민족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국안민輔(保)國安民’과 불우 계층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이념을 제창하면서 창시되었다.
당시 영광의 동학교도들은 1893년에 교조신원敎祖伸寃과 부패 관료의 척결, ‘척왜양斥倭洋’의 사회변혁운동인 보은취회報恩聚會는 물론 전봉준全琫準(1855~1895)이 주도했던 전라도 금구현의 원평취회院坪聚會에도 참여하였다. 이들 집회는 조정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으나 1894년 전봉준의 고부농민봉기에 이어 ‘무장기포茂長起包’로 불리는 1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영광은 이미 1차 운동 직전에 민중항쟁民衆抗爭이 전개될 정도로 관료들과 법성포 조창漕倉의 수탈이 심화된 지역의 하나였다.
따라서 영광은 가장 주도적이며 대규모로 참여한 반중세적 개혁의 ‘동학농민운동의 주무대’가 되었다. 이들 농민군이 포고문布告文을 공포하고 법성포의 이향吏鄕들에게 통문을 보내 민폐民弊의 시정을 촉구하는 폐정개혁弊政改革을 가장 먼저 촉구한 것도 영광지역이었다. 특히 부안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후 4월 12일에 영광 관아를 점령하고, 14일에는 법성포로 진격하여 일본 상인들을 구축한 것은 일제에 대한 반침략·반제국주의의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주도적 활동은 영광의 동학조직이 1880년 전후부터 확고하게 뿌리내려 전근대적 사회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시대의식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영광의 인근지역이자 1차 운동의 진원지인 무장 등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다수의 지도자가 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광은 ‘동학의 대소굴’로 지칭될 정도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여 그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매우 컸다. 당시 일제는 수많은 농민군을 영광 신하리 가축시장(우시장)부근에 무더기로 화장하여 그 시체조차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영광을 비롯한 외세 배척의 2차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영광은 호남의병운동의 중심무대였다. 의병운동은 국권수호투쟁기에 가장 먼저 일어난 사상체계인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에 연원한다. 이 운동은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유생들이 열강의 외압과 침략을 막고, 국권을 수호하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이념에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뒷받침하면서 1860년대 서구 열강과의 통상 요구와 1870년대의 일제의 강압에 따른 개항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1880년대에는 외세 배격에 머무르지 않고 정부가 추진하는 일련의 개화정책을 비판 반대하였다.
영광의 의병운동은 김용구의 활동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동학농민운동과 마찬가지로 호남의 주축을 이루었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의병들의 이념과 다른 지역의 관계, 1910년 이후의 동향 등이 새롭게 추구되어야할 과제로 제시된다. 아직도 영광의 의향義鄕 성격은 다른 분야·지역과는 달리 재조명되거나 부각되지 않은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영광은 1173년에 영광김씨 문관 김보당金甫當이 반무인정권反武人政權의 의로운 항쟁을 전개하다가 화를 당했으며,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국난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주도적으로 줄기차게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바로 영광이 동학농민운동의 주무대였고,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했던 호남의병진의 의병전쟁에 있어서도 영광인들이 주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영광사림의 대의大義와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3.1운동
1919년 3·1운동은 바로 1876년 개항開港 이래 민족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의 강제병합과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일어난 전민족 차원의 독립운동이었다.
특히 3·1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본에서의 2·8독립선언과 함께 고종의 장례날인 3월 3일로 계획된 것처럼 일제의 고종독살설의 광범한 유포 속에서 대대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광의 3·1운동은 3월 10일의 광주에 이어 광주·전남권에서 두 번째로 14일에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곧바로 3·1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강인한 의향義鄕정신이 영광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찍부터 위계후·조철현 등과 같이 신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자각한 인물들의 주도 속에서 적극 전개될 수 있었다고 인식된다.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항일운동 주도층으로 대두하여 1920년대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영광에 있어 14·15일의 만세운동은 최초의 점화단계이자 단시간에 최고조에 달했던 지역적 성격을 지닌다. 15일에는 영광경찰서까지 진입할 정도로 독립쟁취와 수감자 석방의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영광의 높은 독립의지가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서울에서 귀향한 조철현·류일과 국장國葬에 참여한 노준魯駿 일행, 영광에서 독자적으로 거사계획을 가진 영광보통학교교사 이병영李炳英 등과 학생들 그리고 정인영鄭仁英, 정헌모 등이 처음부터 합세하여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만세시위가 광기와 같았다고 지적하고, 지도층들이 ‘남들보다 한층 더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 외쳤다'는 사실을 통해 영광인의 독립쟁취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광의 3·1운동은 오랜 염원이었던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식민통치의 무력탄압장치인 영광경찰서에 쇄도 진입함으로써 처음부터 강도 높은 항거이자 독립 제창의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에 놀란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1차 운동을 탄압했던 것이며, 이후 영광 전 지역의 동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차단하였다. 그러나 영광에 있어서 만세운동은 15일 이후 민족독립의 의지를 환기시키면서 영광 전 지역에 확산되었다. 이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1차 시위를 이은 영광읍과 법성포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3월 27일 영광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을 이룬 만세운동은 시위행진 단계에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1차의 연장선상에서 계획 진행되었고, 일련의 애국가 삐라 살포와 태극기 제작 등이 실행되었던 것이므로 이를 ‘미발사건未發事件’이 아닌 만세운동으로 적극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광 전지역의 만세시위는 당시 전국의 3·1운동이 4월 중순까지 지속된 것이었으나 일제의 철저한 탄압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자료의 한계가 있지만 영광군 전역에 걸쳐 ‘산발적 시위’가 일어났으며, 전주에서 운동을 전개한 고형진高衡鎭과 남궁현南宮炫(1901~1940), 당시 임실에서 이를 주도한 은선암의 주지 양태환梁太煥(1885~?) 등의 외지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영광의 3·1운동은 한국사 전체에서 이해되는 것이지만 민족자결의 원칙이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세계정세 속에서 외교적 청원주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3·1운동의 대중적 확산단계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이 행사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사회운동의 성격와 확산
1919년 3·1운동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은 전분야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1910년대 민족계열의 애국계몽운동 과정과 1920년대 초에 도입되는 사회주의 이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유봉기의 집에서 『유년필독幼年必讀』 을 읽으며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영광의 사회운동을 주도한 위계후·고경진·정인영 등은 한말 이후 신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이미 영광에서는 광흥학교光興學校와 법성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신교육을 통해 독립의식을 환기시킴으로써 1910년 이후 학생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3·1운동 이후 사회운동의 주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운·조용남 등을 중심으로 영광의 사회운동을 주도하면서 사상단체인 토우회 등을 조직하고 그 일부는 전남조선공산당(ML)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물론 좌우익 인물들이 포괄된 영광체육단의 구성으로 볼 때 영광에 있어서 사회·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분파와 파쟁, 민족계열과의 대립상은 적어도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때까지는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의 영향 속에서 1920년대 노동·농민 운동이 이루어졌고, 조운 등 외에도 위계후와 함께 사회운동을 주도한 남궁현南宮炫도 1930년대 고려공산당 회원이자 전남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1927년 이후 제3·4차 조선공산당의 조직과 개편 속에서 전남도지부를 중심으로 청년·노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개별 연구와 함께 한국사회주의운동사와 관련하여 이들이 조직 결성한 단체와 활동상을 밝히는 일은 영광의 온전한 근대사를 재구성하는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에 대한 이해는 광복 이후 남북분단이라는 이념과 대립에서가 아니라 식민지 한국인의 현실과 직결된다. 이들은 사회주의사상을 독립쟁취의 민족과 반중세적인 계급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이념으로 인식하였으며, 바로 이들의 투쟁 역시 민족계열과 동일한 독립투쟁으로서 이들의 계급적 경제투쟁 역시 일제의 지주계급에 대한 항거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농민.노동운동
영광의 사회운동은 이념적으로 민족·사회주의 계열로 구분되고, 영광(연합)청년회를 기반으로 각 단체가 분화 발전된 성격을 지닌다. 결국 1930년대 말에는 일제가 조작한 영광의 최대 사건인 영광체육단사건이 일어나 각 단체의 독립지사들이 탄압받게 된다. 또한 영광·법성포보통학교 등의 교사와 학생층은 항일운동의 선봉이었으며, 전군민이 일치 호응하여 일어난 것은 3·1운동과 영광중학교설립운동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영광인의 분노 속에서 일어난 것은 한국인의 노예적 처지가 단적으로 드러난 영광수리조합·굴농장 사건이었다. 따라서 당시 농민·노동자들은 한국인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가장 혹독하게 식민 피해를 직접 받은 계층이었다.
영광은 항일 농민·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처음부터 서로가 결합하여 전개되었다. 1920~30년대 영광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일본인들이 많이 진출하여 간척지 농장을 확대하고, 1924년에는 수리조합을 개설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고, 소작료와 수리조합비 부담의 증가는 농민층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간척지 개간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예노동에 종사하는 형편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성 전개된 영광의 노농운동은 주로 사회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성격을 지닌다. 1920년대 초반부터 영광의 각 면과 동·리를 단위로 농민·노동단이 조직되고, 이를 기반으로 1922년 10월 5일에 영광노농대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영광노농회는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 제11994호의 1에 따르면, 1925년 이후까지 조선노농총동맹의 전남지부에 속한 단체로서 사회주의계열 서울청년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또한 백수면에서는 1922년 11월에 전체 동리 농민단을 단위로 백수농민조합이 조직되어 당시 영광의 노농운동에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할 정도로 가장 단결력과 투쟁력이 강하였다. 특히 1927년 토우회土友會가 창립되었는데, 영광의 청년·노동운동을 주도한 조운·조용남 등이 결성한 노농단체로서 실생활의 이익을 쟁취한다는 경제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일부는 서울청년회 신파에 속하는 전남 조선공산당(ML)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계급적 경제투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계열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한 민족운동의 한 조류였다.
신간회 활동과 체육단사건
1920년대는 전국에서 사회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새로운 독립운동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도입된 시기였다.
1927년에 ‘정치경제적 각성 촉구’, ‘기회주의 부인’ 등을 강령으로 채택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신간회는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전국 141개 지부와 4만 회원, 방계조직으로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갖추는 방대한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전개되는 영광의 사회운동은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이라는 독립운동노선상의 흐름과 직결되어 이해된다. 1927년 영광청년회의 해체에 따른 영광청년동맹의 결성은 바로 신간회 창립에 따른 새로운 독립운동의 모색 결과였다. 특히 남궁현은 신간회 활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루었고, 최세문의 한글과 유상은의 조선사 강좌 등은 편진옥·정헌모·김은환을 비롯한 영광의 신간회 회원들이 추진한 활동이었으며, 당시 신간회 활동은 학생·노동·농민 운동 등의 분야에 걸친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보다 구체적인 영광의 신간회 활동상은 자세하지 않다. 또한 당시 신간회는 근우회와 함께 여성 교육 및 직업에 대한 모든 제한 철폐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아직 영광의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아 앞으로의 연구가 요구된다.
영광의 신간회 활동은 일제가 먼저 지방지부를 탄압하여 중앙 본부를 해체시키려는 총독부 경무국의 신간회 박멸공작에 의해 1929년 영광청년동맹대회 전후에 걸친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억압 속에서 점차 와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광의 신간회는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독립운동노선상의 좌우익 분열과 대립이 심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좌우익을 포괄하는 인물들이 영광체육단사건에 연루된 사실은 적어도 영광에 있어서 독립운동노선상의 이념과 대립이 다른 지역보다 극심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1937년에 영광체육단사건이 발생되었다. 이는 일경日警들이 ‘동방약소민족 옹호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영광읍 사거리 등에 붙인 후 이를 반일분자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영광의 독립지사들을 검거 탄압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191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위계후를 비롯하여 3·1운동 이후 1920~30년대 영광의 민족·사회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자 민족의 식에 투철했던 지사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부터 체육활동을 전개하면서 궁극적으로 민족의식을 배양하고, 독립을 도모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영광체육단사건은 3·1운동에 이은 가장 규모가 큰 영광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이지만 이를 조작하여 전국에서 가장 열렬하게 전개된 영광의 사회운동을 탄압 말살시키려는 전초전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한국이 일제의 기나긴 폭압을 물리치고 광복을 쟁취한 것은 반세기에 걸친 독립전쟁에서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체육단사건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 동향과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에 대한 자료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질 때 온전한 영광의 근대사·독립투쟁사가 복원 재구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광복, 대한민국 건국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일제가 기도했던 기나긴 민족말살의 폭압을 물리치고 국가와 주권을 되찾은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영광의 건준지부는 8월 17일에 조희충曺喜忠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전남도지부 산하에 조직되었다. 당시 건준 인사들은 대부분 1910년 이후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3·1운동을 비롯하여 각 분야의 사회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건준은 민족·사회주의 계열에 관계없이 독립항쟁에 헌신한 명망가들로 구성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닌 조직체였다. 영광의 건준도 숫자상 사회주의계열이 다소 우세했었으나 위원장 조희충을 비롯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적산관리부장 정욱, 영광체육단사건의 문교부장 이을호 등은 민족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건준은 점차 민족계열 우익이 이탈하면서 사회·공산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물론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동일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45년 말부터 1946년 사이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공산계열의 조직으로 규정하고, 10월 10일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12월 12일 이후 해산 명령과 함께 이를 집행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남과 영광의 인민위 조직과 해체 과정은 중앙과 동일하였다.
광복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였다. 미군정은 지방의 민의를 파악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고문회를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해체시켰다. 이러한 사정은 영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9일 김영하金永夏를 군수로 임명하여 영광의 행정조직을 재구성하였으며,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등의 반공단체 지부가 속속 결성되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공산계열은 지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광복공간의 이념간 대립 구도 속에서 1947년 7~8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 결렬을 계기로 좌익세력의 제거가 본격화되었으며, 단독정부수립론이 제기되는 단계로 진전된다. 결국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미·소 양군이 철수하며, 이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이 결의되었다.
제1공화국 이승만정권과 6.25전쟁
대한민국 건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이승만정권은 대한민국수립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출범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친일세력의 정권기반화 속에서 1948년 제헌국회制憲國會에서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가 처음부터 거센 압력 저지에 부딪치게 되었다. 물론 전남특위에서도 일제 경찰출신 20여명을 구속 송치하고, 영광에서도 영광체육단사건을 일으켜 독립지사들을 고문 탄압한 고등계 형사가 구속되기도 했으나 결국 1949년 8월에 국회에서 반민특위 폐지안이 통과되어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은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이 전쟁으로 250여만명의 사망·실종자와 함께 국토의 모든 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1천만명에 달하는 이산가족離散家族을 낳았으며, 국민생활은 극도의 빈곤에 처해지게 되었다.
특히 전국에서 영광의 피해는 가장 컸다. 한국전쟁 기간 중 영광은 북한의 인민군 제6사단이 1950년 7월 23일에 진입한 후 남로당과 빨치산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당 영광위원회의 지배를 받았으며, 각 면리에도 생산유격대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정치보위부가 주관하고, 인민위원회 등 하부조직이 가세한 가운데 반동분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1952년 공보처가 발행한 『6.25사변피살자명부』 에 기재된 총 59,964명의 피살자 중에서 전남지역은 43,511명이며, 여성은 15,956명 중에서 12,946명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영광은 전남지역의 49%에 해당하는 21,225명에 달했으며, 여성은 전국 여성의 50%인 7,914명이었다.
이는 전쟁기간 중에 행해진 매우 단편적인 통계이지만 현재 전체적으로 25,000~35,000명으로 추산되는 영광의 인명피해는 전국에서 가장 극심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피해는 영광의 마을이 대부분 동족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집단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실을 나타내지만 9월 말부터 극좌 유격대가 등장하여 전쟁이 아닌 학살을 행한데 큰 요인이 있었다.
1950~51년에 전남도당 유격사령부와 526군부대를 설치하고 각 지역의 빨치산활동을 전개하는 각 지구당을 두었다. 영광 불갑산에는 제5지구당이 설치되어 서해안의 섬들과 영산강 서부지역을 대부분 관할하고 있었다. 이에 1950년 10월 2일에 육군 제11사단이 창설되어 각 시기별로 공비토벌작전인 ‘대보름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영광은 전남지구전투사령부 불갑산토벌부대가 투입되었다.
그 결과 영광의 산지에서 2천여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사살되고 1951년 3월 11일에 마지막 근거지인 백수 갓봉이 완전 토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