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소개
홈 > 영광소개 > 영광소개 > 영광의 유래
홍문관의 별칭인 옥당을 상징하는 옥당고을
조선의 성종 시대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다. 1474년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들을 편찬, 간행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무렵부터 홍문관(弘文館)의 별칭(別稱)인 옥당(玉堂)을 상징하는 "옥당고을"의 칭호를 전라도 영광과 황해도 안악에서 사용해오고 있다. (영광을 南岳, 황해도 안악을 北岳) 그 연유는 고려때 芙容倉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28여 고을의 세곡을 관할한 法聖倉등, 지금의 법성항을 거쳐 중국과 국교가 있어 국내외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 하였으므로 일찍이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져 貿易港으로 발달하여 "예악문물"이 찬연한 고을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의 지역이었다.
옥당골 원님의 임기가 만료되면 내직인(中央廳) 堂上官(정삼품)으로 영전하는 분이 많은 고장 이었기에 현재까지도 "옥당고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
고종(26대, 재위 1897~1907)이 12살에 즉위하여, 초기 10년은 동안 흥선대원군(李昰應, 1820~1898)이 섭정하고, 이후 1873년 고종의 친정 선포로 흥선대원군은 정계를 은퇴하고, 전국을 유람할 때 전라도를 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인정과 풍요로운 자연을 보고 팔불여(八不如)를 말했다.
조선 후기에 영광군은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사람사는 집이 많기로는 영광만한 곳이 없다’에서 보듯이 전라도에서 많은 사람이 사는 고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889년 29개면(557개리) 중 12,691호(44,783명)로 "호수(戶數)는 영광만한데가 없다"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이하응)이 말했다고 한다. 호수가 많은 고을수를 적다보니 나주(17,633호/57,782명), 순천(13,669호/46,338명) 다음에 영광이 세번째이고 전라도에서는 전주 다음으로 네 번째였다.현대에 와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비교해 보면 과거 영광은 호수가 많고 인구가 많아 한마디로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