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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진

영광이 낳은 국악인

공옥진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 /재담 /몸짓을 가미한 연극의 일종인 창무극의 창시자이며 그것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리는 한국판 천의 얼굴을 가진 명인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

  • 2010.11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일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
  • 2010전남 영광군 예술 연구소 소장
  • 1996공주 아시아 1인극제, 1인 창무극 심청전
  • 1996서울 두레 소극장, 1인 창무극
  • 1993~1994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순회 공연
  • 1991호암아트홀 1인 창무극
  • 1983문예회관 대극장 1인 창무극
  • 1978공간사랑 1인 창무극
  • 1966~1967박연수 국극 협회 입회 처녀별, 동명성왕, 해방가 등
  • 1945~1947조선 창극단 입단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 /재담 /몸짓을 가미한 연극의 일종인 창무극의 창시자이며 그것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리는 한국판 천의 얼굴을 가진 명인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인간의 껍질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춤고통스러운 삶의 몸짓이 춤으로 표현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도 울게도 한다. 그녀의 삶이 그렇듯 공옥진 몸짓과 표정에도 꾸밈이 없다. 인간의 껍질, 고통과 슬픔의 껍질들을 과감하게 벗어 그녀의 1인 창무극은 솔직하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기교가 없다는 것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느 고전 무용가에게 공옥진의 춤에 대한 이야기를 넌즈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고전무용가에게 당신도 공옥진처럼 춤을 출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부끄러워서, 나는 그런 춤 못춰요라고 잘라 말했다. 바로 그런 점이다. 다른 춤꾼들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옥진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점이다.아무데나 누구앞에서도 놀이꾼의 얼굴을 벗어 버릴수 없는 철처한 공연의 주역같은 데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웃겨야 직성이 풀리고 울려야 진짜 얘기를 한 것 같은 흡족감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술수는 무궁무진이다. 그러나 그의 춤에는 사약함이 없다. 과장이 있지만 교만함이 없고 꾸밈이 있지만 거짓이 없다. 따뜻한 인정이 있고 인심좋은 주인이 손님대하듯 풍성한 반가움이 있다.

공옥진은 1933년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추동마을에서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대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공대일(남도 지방 문화재)이다.
공대일은 일제 때 판소리 명창인 공창식, 공기남과 한 집안으로 공옥진은 판소리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공대일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옥루사창’을 사사하였다.
간간이 춘향가도 익혔지만 춘향가는 단가를 먼저 배우고서 배우라는 호령이 떨어져 그만 어깨너머로 아니면 광목이불의 찬 속에서 사설을 익혔으나 독공한 탓이라 쉽게 내용이 들어오지 않고 장단이 잘 안 맞았다.사랑채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제자들의 소리를 따라도 해 보았으나 안 되어서 부엌에서 군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로 장단을 쳐가며 불러 보기도 했다.

공옥진은 1938년 6세부터 성창순의 부친인 성원목成元睦(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에게서 소리 수업을 시작하여 7세 때 창극단에서 춘향전 어사출도 장면에 출연하면서 김연수의 지도를 받았다.
성원목에게서 소리수업을 하게 된 것은 공대일이 자기가 가르치는 것보다 남에게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한성준 명무名舞에게 장고춤과 살풀이춤을 배웠고, 연희패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최승희에게 춤을 배우고자 최승희 무용단에서 천대 받는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1945년 귀국하여, 공대일이 영광에서 거주하며 광주협률사 단원과 광주 권번 선생으로 있을 때 다시 판소리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 1946년 군산명창대회에서 1등, 1947년 고창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후 1948년 임방울에게서 판소리지도를 받았다.

공옥진은 조선창극단, 국극협회(박녹주), 협률사(임방울), 여성국극단(조금행) 등에서 창극 활동에 참여하면서 조상선, 안기옥, 박범식, 공인옥, 윤소영, 이매방 등 으로부터 소리·춤·창극 등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동초 김연수가 이끄는 우리국극단에 들어가 여러 가지 난역雜役을 맡아 공연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창극단을 전전하면서 얼굴표현과 몸짓, 소리가 늘어갔고 심청가는 김연수 바디로,흥보가는 김연수·공대일 바디로, 수궁가는 임방울 바디를 배우고 익혔다. 이렇게 공옥진은 소리꾼의 딸로서 판소리의 모든 것을 체득하였다.

공옥진이 심청가 등을 1인 창무극으로 창작하게 된 시기는 광복 이후이다. 공옥진은 광복 이후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족과 헤어지게 되면서 이때 여러 걸인들을 만났고, 신체장애가 있는 걸인들도 만나게 되었다. 이런 동료들과 돌아다니면서 이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며 동냥하는 모습들이 일반인과는 다르게 손과 발을 뒤틀거나, 꼬고, 다시 풀어헤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익히게 되었다.
이후 공옥진은 가족들과 상봉하여 창극단 생활을 하면서 소리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창극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18세 때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전남구례 천은사에서 수진秀眞이란 법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으나 2년 2개월(1956~1958) 만에 파계破戒하고 다시 예藝와 속俗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이후 소리 길을 잠시 접고 영광군 영광읍에서 ‘옥진관’이라는 요리집을 운영하면서 마음이 넉넉해진 공옥진은 해방 후 어려운 생활을 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지나가는 걸인들을 위한 잔치를 자주 베풀었다. 그리하여 걸인들과 장애인들은 신명나는 놀이를 하게 되고 이들과 어울리던 공옥진은 그들의 노는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신체장애를 가진 동생과 조카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한을 몸짓으로 풀어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공옥진은 이 시기에 각종 문화축제에서 판소리를 일인 창무극(이하 1인 창무극)으로 발전시켜 공연하면서, 한현선 등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한편 영광군에서는 매년 남도문화재에 출전하였는데 1974년 제6회 남도문화제에서 영광군의 길쌈놀이가 전국최고상을 받았다. 이때 무형문화재 발굴과 총연출은 한국국악협회영광군지부장 한희천이 맡고 지도는 공옥진이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공옥진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중앙대학교 무용학과 정병호교수는 공옥진의 재능에 감동하여 서울의 공간사랑空間舍廊이라는 공연무대에 공옥진을 내세우게 되었다.

1978년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영광에 묻혀있던 공옥진이 서울의 공간사랑에 초청되면서 처음으로 공옥진의 창무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병호는 ‘1인 창무극’이라고 하였다. 이 공연은 4월 20일 공간사랑 소극장 개관기념에서 공연한 심청가 중 맹인잔치 등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대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단독공연이 성사되었다. 공연은 대중의 요구에 의해 이어져 1978.12.2~2.17, 1979.3.3~3.15, 1981.9.14~9.19일 재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공옥진은 전통적인 판소리 기반 위에 재담, 민속무용, 창극을 종합하여 1인창무극을 구성하고 무대에서 선보인 것이다. 그 후 그녀는 1인창무극 흥보전과 수궁가도 공연하면서 전통성을 간직하고 이를 변용,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장르를 창작하는 열정을 보여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명성을 얻은 공옥진은 국내의 각 대학, 또는 각 방송사뿐만 아니라 미국링컨센터, 카네기홀, 일본, 대만, 영국 등 전 세계에서 서민적인 1인 창무극 심청전 공연을 선보였다.

공옥진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공연을 하지 못하였으나 예술에 대한 열정이 2010년 그녀를 다시 국립극장(해오름) 무대에 오르게 하였다. 문화체육부장관·국회의원·영광군수 등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연을 마쳤다. 이 공연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언제나 낮은 자리에 있었기에 지고히 빛나는 예술. 병 신춤의 명인이라 부를 만큼 병 신춤을 재주로 피워냈고 더불어 원숭이, 퓨마등 동물의 모의한 춤까지 추고 있어 전통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에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한다. 곧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모든 재주들을 감고 있어 심청전, 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 낸다. 한평생을 묵힌 술처럼 그녀의 예술은 입에 쩍쩍 달라 붙는다.

그렇다. 그렇기에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많은 관객을 운집시켰고 그녀의 공연에 그녀도 울고 관객도 울고 관객도 웃고 그녀도 웃는다. 언론이 주목했고 호사가들의 입에서도 감탄사 를 자아내게 하는 명인이지만 사실 그녀의 삶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시골의 억척스런 할머니이다.

1931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생(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 서울 협률사 초기 멤버이던 공창식 명창)

1938~1943 최승희에게 사사

1945~1947 조선 창극단 입단

1948 고창 명창대회 장원

1953~1955 구례 천운사 입산 수도

1957~1963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 입단

1961~1963 김연수 우리국악단 입단

1964~1966 김원술 안성국악단 입단

1966~1967 박연수 국극 협회 입회 <처녀별>,<바다로가는사람>,<동명성왕>,<흑진주>,<장화홍련전> <해방가>,<심청전>등 창극에서 주역

1967~1968 일본 순회 공연

1978 공간사랑 1인 창무극

1983 문예회관 대극장 1인 창무극

1985 세종문화회관, 1인 창무극

1991 호암아트홀 1인 창무극

1993 미국/영국/중국/일본 등 순회 공연

1994 런던페스티발 국제예술제 한국 대표외 미주 및 동남아 순회 공연

1995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96 서울 두레 소극장, 1인 창무극

1996 공주 아시아 1인극제, 1인 창무극 '심청전' 현재 전남 영광군 예술 연수소 소장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지정고시(2010. 11. 6. 전라남도 고시 제 2010-326호)
  • - 문화재명 : 판소리(일인창무극 심청가)

    - 지정번호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 29-6호

    - 지정일자 : 2010.11.05

    - 전승지 :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180-7

    - 보유종별 : 일인창무극 심청가

    - 예능보유자 : 공옥진孔玉振(1933년 3월 28일생)

    - 지정사유 : 공옥진은 판소리 명창가계를 타고 태어나 성원목, 김연수, 임방울 등 명창들에게 소리를 학습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창극활동을 해오면서 판소리의 음악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니리와 발림 등을 극적으로 발전시켜 일인창무극을 연행해 왔는데, 이는 문화변용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판소리에 기반을 두고 문화변용의 형태로 발전한 일인 창무극 가운데 주 연행 종목인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인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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