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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

조선중기의학자ㆍ의병장

수은 강항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나 교서관박사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 ·형조 좌랑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인물

  • 본관 : 진주
  • 호 : 수은
  • 별칭 : 자 태초
  • 활동분야 : 정치
  • 출생지 : 전남영광
  • 주요저서 : 「수은집」,「간양록」,「운제록」,「건거록」,「강감회요」등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나 신동神童으로 불리었다. 16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와 군기를 모아 의병을 지원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남행(南行)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왜국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라를 향한 구국 일념으로 기회를 보아 탈출을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발각되어 좌절되자 왜국의 병력과 지형 및 전략, 전법을 왜병 몰래 본국에 보냈다(적중봉소敵中奉疏). 그의 인품과 학식에 감화된 왜인들이 학문을 배우고자 하므로 일본 불교 학자에게 칠서七書와 주자학朱子學을 가르쳐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끌려가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곳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정(敵情)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하였으니 그글을 모아 엮은 책이 간양록이다.
1598년 교토[京都]에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적정을 적어 밀송(密送)하고,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당시 납치되어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격문을 발송, 소집하여 함께 귀국했다.

1602년 대구교수(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포로로 일본에 있을 때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 1561~1619)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켜 일본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억류지였던 일본 대주시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송화(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고종 19년(1882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유림들이 힘을 모아 용계사를 내산으로 옮겨 새로 사우를 짓고 신도비를 세워 내산서원內山書院이라 이름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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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일
1 200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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